[메이블] Dear

Prologue.
불안해?
새뮤얼 에반스는 답지 못하게 우울할 때가 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무릇 ‘사람’이라면 물이 밀려오듯 불안한 날이 있기 마련이니까. 오늘도 그랬다. 적어도 9인치 정도는 더 클, 늘어지는 검은 남자를 메이블은 품에 안았다. 싱그럽던 풀 향기, 젖은 흙의 냄새는 신경의 말초가 잊은 지 오래되었으나, 이따금 그를 품에 안고 있자면 중추에 각인된 장기 기억에서 그러한 것들이 인출되곤 했다.
언제 이렇게 겁쟁이가 되었는지. 그건.
아마 첫 만남부터 일지도.
01.
메이블 애쉴리.
23살. 컴퓨터 엔지니어링의 불세출 천재.
블론디에 대한 착각을 깨트린 당돌한 괴짜.
영국 런던, 노팅힐. 애쉴리家의 셋째. 메이블은 다정한 부모와 두 오빠의 애정을 듬뿍 받은 막내딸이었다. 애쉴리의 성을 가진 이들은 대개 손재주가 좋곤 했다. 원예에 조예가 깊은 아버지, 그를 똑 닮은 재능이 있는 첫째, 요리에 재주가 있는 둘째. 어머니 또한 크고 작은 수공업에 재주가 있었으니, 그 중에서도 달리 튀는 것은 메이블이었다.
아주 특별하진 않았다. 살면서 재능을 가진다는 게 그다지 자주 있는 일도 아니고. 지극히도 평범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어린 메이의 세상 속에서 제일 커다랬던 것은 가족의 애정이었고, 하나에게 쏟아지는 네 개의 사랑이 버거운 나머지- 수줍어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빴기에. 그래서 메이는 애정 속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조곤히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것은 메이가 영특했던 탓도 있지만, 아직은 한참이나 큰 네 사람 속에서 원하는 것을 말하려면 또박또박 말을 해야 했으므로.
메이가 기계 공학에 처음 관심을 가진 건 아주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애쉴리가의 두 남자가 원예에 조예가 깊다고 했던가? 꼬박 다섯살이 더 많은 첫째를 따라 메이는 자기 키를 훌쩍 넘는 꽃나무의 그늘 아래 앉아 두 사람을 지켜보곤 했다. 원예라 함은, 이따금 목공과도 맞닿아 있으므로. 필요한 것들을 그때그때 만드는 둘을 지켜보고 있다 보면 메이는 그 다음을 생각하곤 했다. 말하지 않아도 두 남자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싶어 시선은 곧 바닥에 놓인 책들로 향했지만. 복잡한 그림, 기호. 메이의 새끼 손톱보다 작은 크기로 적힌 글씨들을 읽고 또 읽었다.
시시해. 그것은 지금의 분위기 탓이 아니었다. 같은 내용을 몇 번씩이나 읽으니, 어느 페이지에 어느 글자가. 아빠가 표시해둔 별 모양이 어느 문단에 위치해 있는지, 하물며 책 사이에 끼어 죽은 작은 날벌레의 흔적이 어디 있는 지까지 이제는 다 외울 지경이었으니까.
차라리 꾸물대며 옆의 나뭇가지에서 줄을 타고 내려오는 거미가 더 재미있을 지경이었다. 살랑살랑 봄바람이 부는데도, 아슬아슬하게 줄이 끊어지지 않으니.
작은 한숨을 폭 쉬었다. 뭐가 그리 서운한게 있냐며, 두 남자는 소리내어 웃는다.
하긴, 맞다.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어린애 고민이 커봤자 얼마나 크겠어.
문득 메이는 떠올라서, ‘그거. 잘못했어.’ 하고 덧붙이자, 금세 화제는 돌아가 한바탕 소란이 일곤 한다. 사람은 실수를 하기도 하니까. 메이는 이것을 곧잘 짚어내는 편이었고. 이렇게 사람은 주어진 것들에 빠르게 시각이 변하곤 하니까, 작은 숨이 금세 잊혀지는 것도 당연했다.
02.
둘째와는 세 살 터울이었다. 어릴 때부터 엄마를 따라다니며, 메이의 간식을 만들곤 했던 소년. 아마 메이의 식습관에 영향을 준 건 이 남자이기도 할 거다. 스물 셋이 다 된 메이에게 종종 디저트 선물을 하곤 했으니, 지금도 그럴 것이고.
막내는 이것을 잘 알아서, 응석인 듯 아닌 듯. 먹고 싶은 것을 조르곤 했다. 엄마와 둘째의 사이에서 손을 꼭 잡고 장을 보러 갈 때면, 메이는 먹고 싶은 것을 한참 간 지켜보거나. 곧 ‘사과가 예뻐. 체리 향이 좋아. 레몬은 먹으면 안 되겠지.’ 같은 말을 했다. 안 그래도 귀여움을 받는데, 진짜 어린애 마냥 이것저것 하고 싶다고 말하면 분명 부끄러운 것은 자신일 터다. 그래서 메이는 대개 돌려서 말을 하게 된 것이다. 다행히 가족들은 이러한 메이의 어투에 익숙했으니, 여태까지 응석쟁이가 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뭐, 그래. 이제는 새뮤얼 에반스가 감당할 처지가 되었지만. 받아들여, 새미.
하루는 서점을 지날 때다. 메이는 책을 좋아했으니까, 엄마는 두 아이가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도록 허락해줬다. 분명 둘째에게 막내를 잘 돌보라곤 했지만, 독립심이 충분한 두 아이는 각자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찾아 채 몇 초도 되지 않아 분리되었다. 하나가 요리책에 푹 빠진 사이, 메이는 새 공학 도서를 찾아 적당한 구석에 엉덩이를 붙이곤 앉았다. 사장은 작은 꼬마 블론디가 무엇을 알겠나 싶어선, 같이 먹을 딸기맛 막대사탕을 물려주곤 했으니. 맹랑한 메이는 이를 누릴 줄도 알았다.
마음에 드는 책, 살랑이며 걷는 걸음이 가볍다. 오늘 저녁 디저트는 레몬 머랭 타르트, 돌아갔을 즈음엔 새 꽃들도 들어 왔으려나. 자잘한 생각들을 이어가며 메이는 입안에 작게 남은 사탕을 굴려댄다.
03.
메이블은 어릴 적부터 순수한 공학도였고. 영특한 머리는 아이들 중에서도 눈에 띄는 편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교복은 메이에게 마냥 편한 것이 아니었다. 걸쳐야 하는 것만 여러 개에, 치마를 입고 있으면 도서관 소파에 마음대로 누울 수도 없고. (물론 도서관에서 그러면 안 된다.) 목을 조르는 갑갑한 리본도 불편했으니까.
아니, 사실 다 괜찮았다. 제일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애들이었다. 시시해. 시끄럽고. 한심해. 메이의 시각에서 ‘애들’이란, 정말이지 천방지축이었다. 통제도 안 될뿐더러, 메이블의 눈에는 위니 더 푸의 티거가 몇 마리나 뛰어다니는 것 같았으니까. 말썽쟁이. 메이의 감상은 딱 거기까지였다. 차라리 용수철이 몇 개나 들어박힌 기계를 조립하는 게 더 쉽겠다 싶었다. 하지만 이 단순한 호랑이들은 자그마한 자극이 도리어 폭발하는 피드백으로 돌아왔으니, 어울리는 것이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사회성을 배웠다는 의미다. 굳이 애써서 미움을 받을 필요도 없으니까.
유달리 똑부러지는 성향 탓에, 아이들의 반응은 딱 두 가지로 나뉘었다. 그것을 선망하거나, 그것을 질투하는 것. 하지만 두 가지를 크게 다르게 보진 않았다. 어쨌건 자신에 대한 평가였고, 평가라는 것은 쉽게 바뀌기도 해서. 이를 테면, 복잡한 수식도 쉽게 계산하고, 할 수 있는 선에선 아주 쉽게 아이들의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는 메이가 고깝지 않은 이가 있는 것은 당연할 거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한 순간에 뒤집어지기도 하니까. 곧장 한 걸음 뒤에서 졸졸 따라다니는 (비유적 표현이다) 바보 같은 검은 머리 소년, 아서가 딱 그랬다.
메이만큼이나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아서 데이비슨. 메이가 보기엔 그 놈이 그 놈이긴 했다. 선명하고 예쁜 아쿠아마린 눈동자를 가진 어린애는 메이를 그닥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메이의 눈에는 어땠지? 풀밭을 뛰어다니는 티거들 중 꼬리 대신 두 발로 걸어다니는 놈 정도로 보였을까 말까다. 둘의 관계는 가까워지는 법이 없었다. 하나는 지독히도 밀어내고, 다른 하나도 그다지 붙임성이 넘치는 편은 아니었으므로.
04.
공학도의 길을 걷던 메이는, 개중에서도 컴퓨터 공학에 관심이 깊었다. 이유를 묻는다면, 그래도 ‘비교적’ 몸이 편한 일이라나 뭐라나. 아이들이 슬슬 진로를 고민할 시기에, 메이는 그다지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되는 것이었으므로. 재능과 흥미가 일치하는 일이기에 가능한 것이긴 했지만 말이다.
바쁜 하루 일과. 친구들과 수다를 나누거나, 공부를 하기도 하고. 혼자 남는 시간이 있다면- 메이가 하는 행동은 두 가지였다. 고등학생이 된 기념으로 선물 받은 랩탑의 자판을 두드리거나,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날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신청해둔 도서가 들어왔을까? 아쉽게도 그러진 못했다. 덕분에 오늘 도서관에 온 것을 조금은 후회하는 중이다.
애쉴리. 미성의 남자 목소리가 들린다. 뒤를 바삐 따라오던 아서는, 아서 팬드래건의 이야기와는 달리 참 멋이 없는 사내였다. 객관적 의미에선 완벽했다. 2등이면 어떤가, 사실 애들은 그것 보단 그의 외관이나 성품에 더 집중하곤 했을 테니까. 투기 많던 어린애는 그것을 제법 죽일 줄도 알게 된 모양이었으니, 여하튼 모난 구석은 없었다. 메이가 그것을 모를 리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눈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봤자 ‘애’잖아? 특별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차라리 윤이 나고 반짝이는 파이프 하며, 기하학적으로 완벽하게 맞물린 크랭크 따위가 더 동했을 것이다.
시끄러워. 가벼운 말로 응대한 메이는 제 갈 길을 찾아 책장 사이로 숨어버렸다. 데이비슨은 따라 메이를 쫓고. 메이는 그 다음 칸으로 훌쩍 넘어간다. 그건 둘만의 놀이였다. 도서관 안의 책장 속에서 넘나들며, 끝의 끝까지 닿고 나면. 그제서야 놀이는 끝이 난다. 잡았다, 하는 소년의 말에, 메이는 착각이야, 하고 대꾸하며 도로 공학 서적으로 향하려 했다. 신청한 책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은, 온 도서관을 돌아보며 확인한 것이었다. 혹여나 하는 마음이 확신이 되고 나니 미련도 없었다.
메이는 걸음을 돌렸다. 시끄럽다는 말로 부족했는지 이따금 말을 걸던 데이비슨에게, 메이는 ‘S’자로 시작하는 욕설을 뱉었다. 음. 이제 조용하네. 메이는 늘 보던 것들 중, 손에 닿는 것을 골랐다. 한 권만 더 고른다면, 아마 최대 대출 권수가 채워질 거다. 그 즈음 턱, 손때가 묻은 책 하나가 품 위로 올려졌다.
05.
특별한 계기는 아니다. 흥미가 동했을 뿐이었다. 데이빗이 골라 준 책은 꽤 나쁘지 않았다. 읽어봐, 하고 장담하던 책은 한 권의 SF 소설이었다.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해 그다지 취향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제 편견이었나 보다. 떠올리면 그랬다. 적어도 그 자신의 기준에서, 의외로 메이는 낭만론자에 속하고 있었으므로. 온정을, 흘러가는 것들을. 걸음마다 놓이는 것들을 조금도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괴짜였기에, 터무니없는 것이라도 웃음을 흘렸나 보다.
그 즈음엔 데이빗이 빌려준 책을 많이 읽었다. 장르는 다양했다. 하루는 로맨스 소설이기도 하고. 어느 하루는 고전 문학이기도 하고. 이따금 새로 출간된 공학 서적을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메이의 품에 안겨주었다. 메이는 지금의 관계를 퍽 좋아했다. 어쨌건 우호적인 관계였으니까, 바보 같은 데이빗. 그러다가 빵 한 조각만 남을지도 몰라. 메이는 농담을 섞어 말했다.
10대는 빛이 났다. 일렁이는 밀밭의 가을빛을 담은 머리칼이 살랑이며 흔들렸다. 우리는 사진을 참으로 많이 남기기도 했다. 이제는 떼어버려 작은 상자에 담아, 다락방에 넣어둔 것이지만. 작은 종이에 담긴 것들은 서툴렀던 메이블 애쉴리의 한 때였다. 이제는 앤티크 샵에서 값이나 쳐줄 그때의 그 폴라로이드 카메라. 인조 가죽 케이스에 담긴 것을 메이는 아직도 기억했다. 새미가 그 카메라를 보면 오래되었다는 말에 코웃음을 칠까?
어느 밤에는 영화를 보았다. 늦은 시간의 밤. 추워. 작은 어리광을 부리고 나면, 데이빗은 이따금 손을 잡아줬다. 통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기 때문임을 알았지만, 그 애는 나무라지 않았다.
06.
프롬 파티의 밤이었다. 프롬 킹과 퀸의 자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러한 자리는 학창시절 내내 분위기를 주도하는 아이에게 돌아가곤 한다. 메이가 주도하는 자리와는 온전히 다른 의미다.
데이빗이 물었다. 이제는 청소년보다 청년에 가깝지만. (그건 메이도 마찬가지다.) 제법 낮은 부드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파트너 자리를 물었다. 자리는 공석이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메이는 선심을 쓰듯 말했다. 내어지는 손길을 메이는 잡았다.
메이는 춤에 소질이 없다. 그건 몇 번이고 입증된 결과였으며, 내켜 하는 편도 아니었다. 덕분에 파티 내내 몇 번이나 데이빗의 발을 밟았다. 그가 아파하는 기색도 없이 가볍게 이끌던 손짓에도, 메이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정신없어. 혼란스럽고.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파티의 끝 무렵, 우리는 밤길을 걸었다. 익숙한 듯, 낯선 길이기도 했다. 그날은 그냥 느낌이 이상했다. 붕 뜬 것 같은 기분. 메이는 그 자신이 아주 완벽하게 정상임을 알았으나, 가슴 한 켠에서 아지랑이처럼 피는 것들에 속으로 물음표를 하나 그렸다.
여름 밤. 데이빗은 완벽한 파트너였다. 외모도. 매너도. 춤 실력도. 그래서 만족스러웠다. 이보다도 즐거운 파티가 더 있을까, 메이는 생각했다. 그것을 드러내진 못했지만, 맞잡은 손에 깍지를 끼워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때는 너도, 나도. 둘 다 열기에 취했던 모양이다. 처음은 아팠다. 또 열이 나고. 서투르지만 기분이 좋기도 했다. 제 목소리가 익숙하지 않음을, 그날 처음 느끼기도 했고. 어쩌면 붙어 앉아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을 어설프게 따라한 것일 수도 있다.
그 날은 평소보다 느리게 눈을 떴다. 조곤한 대화 몇 마디. - 애쉬. - 응. - 그럴 줄 알았어. 주어도, 목적도 없는 대화였으나 서로가 더 묻지 않았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함 이기도 했고. 제멋대로인 메이 탓이기도 했고.
졸업식 하루 전. 메이는 둘째와 함께 디저트를 만들었다. 고마워. 작은 쪽지가 적힌 것과 함께, 미니 케이크를 만들었다. 선물이야. 졸업 선물. 메이는 그것을 데이비드에게 건넸다. 그가 나중에 볼 수 있느냐 묻던 물음엔, 바보 같은 질문을 한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데이비드는 애쉴리가 건넨 선물을 들고 돌아갔다. 헛웃음이 나왔다. 마지막까지 ‘메이블 애쉴리’스러운 선물이었다. 케이크 하나. 그 하나만이 남았다.
07.
임페리얼 칼리지. 공과대학으로 유명하며, 메이블 애쉴리가 졸업한 곳이다. 그 사이 애인도 사귀어 보고. 프로젝트도 수차례 따내 성과를 보이기도 하고. 본 성정과 맞지 않게 너무 바쁘게 살았다. 나 이제 쉴거야. 우수한 성적으로 조기졸업을 마친 메이는 가족들에게 독립을 선언했다. 톡톡한 재능으로 모아놓은 것도 적지 않으니 독립이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메이는 여전히 가족들에게 ‘막내’였기에 불안해했지만, 메이의 추진력 덕분에 독립 프로젝트는 아주 성황리에 해결되었다.
메이는 자신의 삶에 만족했다. 무엇보다 프리랜서의 가장 좋은 점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나서 찾아볼 수 있고, 자기 시간을 양껏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넓고 비교적 깔끔한 분위기의 실내- 소파 한 켠에 메이는 늘어져 있었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때? 그래도. 가족들의 걱정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듯, 혼자 머무는 삶은 제법 적적하기도 했다. 애늙은이 같은 소리였지만 그랬다. 그런 이유에서 메이블은 강아지를 입양하기로 했다. 때마침 지인으로부터 그가 키우던 보더콜리가 새끼를 낳았다는 연락을 받아서였다. 이 결정은 새미를 괴롭히는 깜찍한 시발점이 되었지만, 그 날의 메이는 몰랐을 것이다. 뭐, 알았다고 해서 무를 생각은 없었겠지 싶으면서도.
아직 털이 보송보송한 아기 강아지. 대니는 메이의 품에 안기는 것을 좋아했다. 아마 헥사곤으로부터 협력 제의를 받던 순간에도 그랬다. 메이가 걷는 길을 바쁘게 쫓아다닌 탓에 고소한 향을 내는 앞발에 코를 묻으며 메이의 한 손은 스크롤을 내렸다. 기간에 비하면 상당한 금액, 아마 이에 생명수당이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미지를 탐사해야 하는 일이었으므로 그랬다. 그래도. 별 일 있겠어. 이러한 종류의 일에는 마땅히 그들을 보호하는 인력이 있기 마련이다.
어느새 취향으로 들어박힌 낭만이라는 것이 동해선. 돈과 낭만. 두 가지 이유에서 메이는 제안을 수락했다. 자신보다 더 나은 엔지니어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것이기도 하고. 말 그대로 무겁고 둔한 슈퍼컴퓨터를 몇 대나 박아 넣는 것보다 메이블 애쉴리 한 사람이 감당하는 것이 자신의 생각에도 효율적이었다. 그렇고 말고. 메이는 가족들에게 대니를 맡겨두며, 적당히 출장을 다녀올 거라 말했다. 한 2주 정도? 연락은 잘 안 될 테니까 돌아오면 연락할 게. 메이가 말했다.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불안해할 사람들이기에, 아마 이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08.
울창한 밀림. 메이의 인생에서 이런 곳은 처음이다. 이토록 오지는 낯설었으나, 본디 이러한 곳에 보물이 잠들어 있다고 하던가? 헥사곤의 연구동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지나치도록 아름다운 설비들이 잠들어 있었다. 애정이 더해지면 깨어날 그런 장소. 나디우렘. 연구동이 자리한 섬의 이름. 그것을 곱씹으며 주변을 돌아본다.
나디르, 라는 작은 단어로 통용하기로 한 존재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대개는 수십을 살고도 아주 멀쩡한 육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표준적으로 떠올리는 인간의 육신과는 다소 달라져 있었으나, 그들의 상태가 나빴느냐 묻는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의외라는 것은. 대부분이 의복을 갖추어 입고 있었다는 것일터다. 오지라고 하길래, 마냥 풀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을 줄 알았는데. 메이는 생각했다.
뺨을 스치고 작은 나뭇잎이 흘러내린다. 벌써 왔어? 하는 울림. 그에 자연히 고개는 올라간다. 시선을 끌기 위한 것이었더라면, 확연히도 잘 들어 먹힐 남자. 푸른 세상에서 유리된 검은 사내가 바로 너였다. 그러는 네 쪽도, 기다리고 있었나 봐. 그게 둘의 첫 마디였다.
에릭 바스커드. 남자에 대한 첫번째 감상은 다음과 같다. 아름답고 기계적인, 자연스러운 듯 부자연스러운 행태로 얹혀진 불쾌한 골짜기에 메이의 시선이 동했다. 거미인가? 되려 지나치도록 컸기에 두 개념이 곧바로 합치되지는 못했다. 20, 30대 즈음 되어 보이는 남자는 참으로 격이 없게도 영국의 숙녀를 위협했다. 신사답지 못한 행동들을 꼽아보자면 한 두개가 아니었지만. 바보 아니야? 이 곳에는 저희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짧은 몇 마디에 불린 메이라는 애칭은, 지금의 너 또한 입에 달고 사는 것이었다. 알아? 난 아직도 그때가 생각나는 걸.
우리는 협력을 하기로 했다. 너나 나나. 이해심 깊은 협상가들이었기에, 아마도?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받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서로에게 빚이 되기로 했다. 말장난이 아니라, 정말로 ‘빛’이 아닌 ‘빚’이 되기로. 첫 데이트는 연구동이었다. 에릭의 팔에 감겨진 메이의 손 끝이, 가볍게 건반을 누르듯 움직이고 멈추길 반복했다. 그것이 깍지로 바뀐 것은 한 순간이었고. 관객에서 배우가 된 기분이었다.
그 누구보다 인간으로 남고 싶어하는 너는, 인간. 인간. 돌이켜보면 그것을 구분 지어 이야기하곤 했다. 자신을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했다. 거짓된 탈을 뒤집어쓰고, 연기를 하던 너는 참으로 애쓴다 싶다. 그것이 에릭이던. 공주님이던. 네 무대에서 메이는 용사님이 되기로 했다. 키스해주지 않겠다는 공주님은 꼭. 정말 공주님 같았다. 세상 물정이라는 건 모르고, 제 잘난 맛에 사는- 이라고 하면 새미 네가 충격을 먹으려나. 아니 뭐. 그때는 그랬단 뜻이다. 서운해 하지마, 새미. 메이는 품에 안긴 남자에게 입을 맞춘다.
어쨌든. 우린 503호로 향했다. 빚쟁이끼리 날이 바짝 서 올라선, 가볍게 주고받는 대화는 나쁘지 않았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거미줄 위에 서서, 그것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가늠하곤 했다. 서로가 포식자던. 피식자던 간에. 불안은 메이가 에릭에게 보호받고 있었음에도 가시지 않았고, 의혹은 어느덧 확신이 되었다. 에릭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그것을 마냥 애칭으로 치부하기에도 무거워진, 여느 누군가의 이름이었다. 복잡한 것은 싫다. 같은 연유로 거짓말도 좋아하지 않았다.
연기도, 어쩌면 거짓의 일종이기도 했다. 자기 소개를 해야지. 변함없이 불러줄 테니까. 그가 메이블 애쉴리를 경계하고 있음을 안다. 가시를 세우는 검은 장미. 곧이라도 쏘아질 독.
불안해? 지금처럼 물었다. 응, 가르쳐줘. 이어진 답 또한 당연한 것이었고. 추파의 의미가 아닌 ‘재보다’라는 의미에서, 남자의 손가락이 메이의 머리카락을 흘러 넘긴다. 새뮤얼 에반스. 새뮤얼. 일부러 소리 내어 말한다. 그것을 기억하기로 했다. 100, 그리고 1. 연단위를 압축하는 세기라는 단어는, 아주 쉽게도 너를 가까이 만들었다.

어느새 우리는 관객석도, 무대도 아닌. 오르내리는 계단이었다. 그 계단에 앉아,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도 같다. 이미 처음부터 가면을 쓴 모습이었는데, 가면을 벗고 나서 네 본질을 안다 한들 내가 너를 무대 위로 밀쳐버릴 이유는 없었다. 결국 그 모습 또한 너다. 배우도. 관객도 되지 못하는 어중간한 태도에 메이는 이따금 웃기도 했다. 혼자서 삽을 파고 묫자리를 만들 듯 구는 것은 그때도 지금도 변함이 없다. 네가 언젠가 그 삽을 던져 버리고 무대 위를 뛰어내려 올까? 나는 계단 아래에 앉아 널 기다린다. 그 날도, 지금도.
섬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 용사의 눈을 가리는 공주, 아니 왕자라니. 꽤나 마니악한 취향이지 않아? 하루는 알러지에 걸리기도 했고. 어쨌든. 우리에겐 목적이 있었다. 섬에 대해 알 필요가 있었기에, 장소는 유적이 되기도. 때로는 바닷가가 되기도 했다. 매번 짝을 이룬 것은 아니었으나, 제법 많은 모험을 했다. 여정의 끝에서 기억에 남는 때가 있다면, 단연 섬을 돌아보는 일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불꽃이 하늘을 수놓는다. 불안한 상황과는 달리, 메이는 낭만을 즐기기로 했다. 나쁠 것도 없잖아.
그 날은 무대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 이상으로, 극장에 온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조금이나마 인간이니까. 새뮤얼은 말했다. 당신은 인간이잖아? 메이가 되돌려준 답은 그것이었고. 우리의 관계는 특이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메이가 걷는다. 가까워진 것에 돌아볼 때면, 새뮤얼은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감춘다. 달린 것도. 네 손을 놓은 것도 아니었지만, 메이는 어느 날의 술래잡기가 우리의 관계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수정 해변은 예뻤다. 정말. 솔직하고 주관적인 감상이다. 나란한 구두와 운동화 자국들. 그 끝에는 너랑 내가 있었다. 사르르 놓아진 메이의 손은 어느새 물 아래로 향했다. 형형한 녹색 눈동자에 밝은 노란색, 나디우렘에 있지 못할 밀밭의 색이 떠오르고 나면 메이는 물 아래로 주운 것을 건넨다. 샌드달러. 무대의 표값이었다. 우리는 어느 즈음 무대 뒤로 향했나 보다. 새뮤얼과 메이. 메이와 새뮤얼. 다음 공연을 어떻게 해야할까, 사각이는 펜으로 그림을 그린다.
아이러니하게도. 새뮤얼은 그림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고작 낙서 몇 개였을 뿐인데. 그렇게 좋아해줄 줄은 몰랐는데. … 단순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어지는 걸음을 옮기며. 새뮤얼은 단언하며 제가 주어진 상황이 ‘꽝’이라는 말을 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지금의 모든 선택은 메이블 애쉴리가 스스로 한 것이다. 후회하는가? 그럴리가. 그렇기에 흔들릴 이유도 없다. 그 자신을 믿고 있었던 것이기도 했고. 너를 믿고 있었던 것 때문일지도 모르지. 나아가, 나는 어쩌면. 탐사대도, 나디르도 오랜 순간부터 믿고 왔었을 수도 있고.
한 세기 넘도록 섬에 고립된 새뮤얼 탓에, 메이는 말을 정정하며 그에게 자신이 잭팟이라 말했다. 그 이유를 일부러 꼬치꼬치 답하진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드러내는 것은 메이의 취향이 아니었으니까. 굳이 다시 물어도, 새뮤얼에게 돌려줄 메이의 답은 ‘세기의 천재가 네 곁에 있잖아’ 라는 말 따위였을 것이다.
여름은 메이에게 이상한 계절이었다. 꽃망울이 맺어 막 피기 시작한 날에 태어났기 때문일까? 영국 본토 기준으로 여름이 되면, 메이의 삶에선 종종 변칙적인 일들이 일어나곤 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나디우렘에 머물 적도 넓은 의미에선 여름날이 맞았다. 시간으로 보나, 날씨로 보나. 탐사의 끝무렵엔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어느 것 하나 정해지진 않았지만,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했다. 섬을 나가고 난 이후의 미래. 네가 어디로 나설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연스레 ‘나갈거야’ 라는 점에서 메이도 기대를 했나 보다. 새미, 네가 대니를 성가셔 할 것이란 것을, 그 날에도 어렴풋 알았다.
맺히던 핏방울. 그것은 치명적일리가 없었다. 차라리 대니와 놀아주다 넘어진 바람에 생긴 생채기가 더 아팠겠지만. 새뮤얼이 품은 것은 몸을 무겁게 만들곤 했다. 입안에선 포도당 캔디 특유의 단맛이 났다. 머리가 느끼는 자극이 두 개라 어느 것을 먼저 처리해야 할지 혼란스러웠기에, 메이는 제 머리보다 새뮤얼의 몸을 말 그대로 이용하기로 했다. - 곤란하다니까, 키스도 못한 다니 정말 저주스럽지. - 키스해주지 않겠다고 한 건, 너였잖아. 있지, 새미. 다시 생각해봐도 네가 깨물었으면서 이렇게 말한 건 조금 괘씸했던 것 같아. 응. 아니, 아니야. 또 키스해도 돼.
키스를 못하는 저주라고 해야 했을까? 왕자에게 풀린 저주를 풀 수 있는 게 용사라면. 메이는 기꺼이 입을 맞추기로 했다. 네가 안된다고 했지, 내가 안된다고 한 적은 없는 걸. 가벼운 것일 뿐이었으나, 그 즈음 메이는 작은 희열을 느꼈다.
맞춘 입의 끝에서, 우리는 키스가 가진 힘에 대해 실없이 떠들었다. 비록 그 즈음엔 메이가 안긴 모양새였으나, 지금처럼 메이는 새뮤얼의 머리를 제 품으로 품었다. 그 이후론 어땠더라.
09.
탐사대의 끝에선 나디르와 탐사대 개개인에게 하나의 선택권이 주어졌다. 약 이틀 정도 되는 시간 동안 메이는 결정을 해야만 했다. 냉정하게 말하건대. 메이는 어느 쪽에 표를 던저도 상관은 없었다. 그야말로 메이는 ‘외부 협력’의 위치에 서 있었기 때문에 마냥 연구를 위해서, 혹은 은폐를 위해서-와 같이 이렇다 할 주관은 없었다. 굳이 자신의 의견을 더한다면, 이 물음은 탐사대의 몫이 아닌 오롯이 나디르의 의견을 존중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메이는 그 시간동안 탐사대와 나디르. 양쪽에게 물음을 묻고 이야기를 듣기 위해 시간을 썼던 것 같기도 했다.
선택을 위한 표를 던지던 마지막의 마지막에서. 나는 네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너는 섬을 벗어났겠지만. 그 기대에 힘을 던져주고 싶었다. 적어도 이 선택이 틀린 것이 아님을 알았던 탓에, 그저 하나의 계단을 네게 놓아주었다. 무대에서 이젠, 걸어 내려올 수 있도록 말이야.
안녕. 새뮤얼 에반스.
Epilogue.
시간이 흐르고 지금이다. 여름이 지난지도 오래, 바깥에선 하얀 눈이 내렸다. 곧 크리스마스인지라, 런던은 온 동네가 축제 분위기였다. 메이의 집도 그렇다. 정확히는 메이, 새미, 대니, 셋의 집. 셋이서 보내는 시간이 메이는 퍽 마음에 들었기에 자신의 집을 아주 좋아했다.
신에 대해 그다지 특별히 여기지 않는 성격과는 별개로, 크리스마스는 연례 행사인 만큼 크고 작은 장식들이 집에 꾸며져 있었다. 크고 작은 조형물부터 트리까지. 트리 한쪽에는 새미가 만들어 걸어 놓은 한 쌍의 봉제 인형이 걸려있었다. 아마 메이가 만들었더라면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을 텐데. 아끼는 장식물인 만큼, 크리스마스가 끝나면 잘 보이는 곳에 둘 생각이다.
그것을 시야에 두며, 메이는 새미의 품에 안긴 모양새다. 정정하겠다. 새미가 메이의 품에 안긴 거다. 선후 관계는 확실히 해야 한다. 꼭 잘못한 게 있는 사람 마냥 구는 새미는, 이렇듯 가시도 잔뜩 움츠린 채 다가올 때가 있었다. 평소에도 곧잘 가볍게 애정을 확인하는 듯했지만, 그 와는 또 궤가 달랐다.
어린애 같아, 하곤 생각하면서도. 이 덩치만 큰 커다란 거미를 보고 있자면, 메이는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굳이 웃는 모양새를 보여줄 필요는 없어, 표정을 갈무리하곤 새미를 달랜다. 내일은 뭐 할까? 저녁에 먹고 싶은 게 있어? 음. 내가 만들면 네 기분이 더 안 좋아질 테니까, 지난 번에 갖고 싶다고 한 게 있지 않아? 조곤히 말을 늘어둔다. 언뜻 보면 마냥 마음을 달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여느 물음들은 하나같이 다음으로 다가올 미래의 스케치를 그리는 것이다. 그 스케치에는 나도, 그리고 너도 있었다. 그러니까 색은 네가 칠해줘. 예술에 조예가 깊은 새미. 그 색이 어느 색이라도 좋아. 네 눈을 닮은 초록색이 되어도 좋고, 내 머리칼을 닮은 노란색이 되어도 좋아. 노을이 구름과 맞물려 이지러질 적 피어나는 분홍도. 깊은 밤에 내리는 남색도. 대니의 털을 닮은 하양이나, 영국의 변덕스러운 날씨를 닮은 어떤 색채라도.
에릭 바스커드를 연기하고, 때로는 거미가 되어버리고, 능글스레 이름을 부르는 것도 전부 새뮤얼 에반스였다. 어쩌면 몰라. 더 먼 훗날에 네가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버린다고 하더라도. 나는 네 이름을 기억하고. 너를 알아. 메이블 애쉴리는 새뮤얼 에반스를 애정하니까. 그 사실이 변할 일은 없을거야. 믿어봐. 나는 네 작은 잭팟이잖아? 세기를 넘어서 만난 둘도 없을 천재니까, 믿어도 돼.

지금의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관계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늘 그랬다. 하지만, 적어도. 메이는 새미에게 향하는 이 감정의 형태가 사랑의 형태와 아주 닮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사랑. 그 자체일 수도 있고.
사랑스러운 새뮤얼 에반스. 이제는 연기를 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어느 날 네가 다시 무대에 오른다고 해도, 2층 5번 박스석에 앉아 네 무대를 지켜보고 있을 게. 너에게 잘 어울리는 붉은 장미를 무대위로 던지면서, 돌아가는 길에는 무대에서 내려온 널 기다릴 테니까. 같이 돌아가자. 하얀 눈길 위로 두 사람의 걸음을 남기면서, 다음 그림을 그려보자.
Epilogue 02.
지금으로부터 몇 개월 전. 메이는 늘어지던 몸과 함께 품의 대니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내렸다. 일하는 시간이긴 했지만. 가끔 일하기 싫은 날도 있잖아. 사무 업무를 하는 직원들도 그러하듯, 메이 또한 웹서핑을 할 때가 있다. 새뮤얼 에반스. 네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까지 메이는 들은 적이 없었다. 에반스. 에반스. 이따금 새미가 간간히 내뱉는 것들이나, 행동들로 추정하건대 짐작되는 것들이 아주 없진 않았다. 메이는 자신이 탄생시킨 유능한 AI 비서를 호출했다.
애니. 대니와 이름이 비슷한 것은, 그야말로 애니가 먼저 태어났기 때문이다. A로 시작하는 이름 중 부르기 편한 것을 골랐을 뿐이다. 새뮤얼 에반스에 대해서 알아봐 줘. 신문사니 뭐니, 들쑤시며 굳이 제가 발 벗고 뛸 필요도 없고. 몇 년 전 마냥 도서관 내를 뛰어다닐 기력도 없다. 그래서 메이는 가장 편한 방법을 선택했다. 애니가 추려낸 글들은 데이터화 된 것이 아닌 오래된 종이 신문을 스크랩한 이미지가 대부분이었다. 새뮤얼 에반스. 정치가. 차기 상속자. 살인 사건. 실종. 어쩌고 저쩌고. 매도하기 위한 가십거리라는 것은 쉽게 읽혔다.
아. 정말. 예나 지금이나 기가 막힌 스캔들을 좋아하는 인간들은 세상에 널렸단 말이지. 한 세기가 다 되어가는 과거의 일이니, 이를 제대로 수사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메이는 이러한 부류의 이야기를 접할 때면, 차라리 거미가 줄을 타고 내려오던 것을 지켜보던 때가 더 즐겁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 더해. 새미는 지켜보았을 때, 마음 가는 대로 누군가를 살해할 사이코패스는 적어도 아니었다. 어느 이유에서? 라고 물으면 천재적인 두뇌의 조합과 여자의 감이다. 물론 이 소리는 거짓말이다. 하하. 안 웃겨? 그럼 됐고.
… 그냥. 정말 그랬다. 누군가는 이를 스톡홀름 신드롬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엄연히 그것과는 달랐다. 새뮤얼은 겁이 많았다. 하물며 불안하다고 한 들, 손에 쥐여진 것을 망가뜨릴 사람도 아니었다. 보라. 새미의 방을 보아도, 나디우렘에서부터 가지고 온 크고 작은 기념품들을 소중히 걸어두지 않았던가? 그러니 메이는 떠오른 기사를 믿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신문 기사가 대중적이고, 중립성을 지킨다 한들. 그것은 허울이었다. 기자들과 언론사들의 생각이 담긴 것들. 메이는 그것을 이미 몇 번이나 겪었다. 크고 작은 인터뷰 자리에서, 제가 입밖으로 뱉은 것들이 늘 의도한 대로 드러난 것이 아니었기에.
그만하면 됐어. 애니. 기록은 말소해줘. 언제 띄웠냐는 듯, 화면을 채우던 것들은 채 몇 초도 되지 않아 사라졌다. 메이는 누군가의 행적을 파헤치는 취미는 없었으니까. 제 직업이 탐정도 아니고. 언젠가, 어느 날. 새미가 그것을 털어 놓을 마음이 들 거든 어련히 알아서 할 일이었다. 제 역할은 그런 남자를 기다려 줄 뿐이었고. 그치? 대니. 그러니까 어서 가서, 새미 좀 괴롭히고 와. 메이는 살며시 바닥에 대니를 내려주었다. 엉덩이를 두드려주니, 신이 난 눈치로 달려나간 녀석을 따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커피나 마실까? 날이 춥네.
슬슬 영국에도 겨울 바람이 불기 시작한 어느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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